6월의 아픔6월의 아픔
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1월 국방부는
소위 특수유격전을 임무로 한 대대급 규모의 요원을 선발하여
훈련을 마친 후 적군 후방으로 침투 시켰다.
이들은 영화에서처럼 북한군의 군복을 입고 위장 잠입하여
요인 암살, 부대 폭파 등 교란을 통하여 적에게 손실을 입히고
아군작전에 많은 기여하였다.
이들 600여명 중 생존자는 약 200여명, 사망의 큰 요인은
동사, 아사가 가장 많았으나 억울한 것은 적군복장을 하고 있으니
아군에게 적군으로 오해를 받아 사살된 분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또한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상당수는 임시 군인신분으로
군적에 미등록되어 복무사실이 확인이 되지 않아
포상은 커녕 또다시 징집되어 이중으로 군복무를 했다고 하니
보통 서운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을 통해 유쾌한 기억을 가진 이 그 누가 있을까.
우리가 6월이 되면 숙연해지는 까닭은
58년 전에 온 국민이 겪었던 큰 슬픔과 고통이
결코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1월 국방부는
소위 특수유격전을 임무로 한 대대급 규모의 요원을 선발하여
훈련을 마친 후 적군 후방으로 침투 시켰다.
이들은 영화에서처럼 북한군의 군복을 입고 위장 잠입하여
요인 암살, 부대 폭파 등 교란을 통하여 적에게 손실을 입히고
아군작전에 많은 기여하였다.
이들 600여명 중 생존자는 약 200여명, 사망의 큰 요인은
동사, 아사가 가장 많았으나 억울한 것은 적군복장을 하고 있으니
아군에게 적군으로 오해를 받아 사살된 분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또한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상당수는 임시 군인신분으로
군적에 미등록되어 복무사실이 확인이 되지 않아
포상은 커녕 또다시 징집되어 이중으로 군복무를 했다고 하니
보통 서운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을 통해 유쾌한 기억을 가진 이 그 누가 있을까.
우리가 6월이 되면 숙연해지는 까닭은
58년 전에 온 국민이 겪었던 큰 슬픔과 고통이
결코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